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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a time

한류의 기원을 분석한 프랑스 언론

by 홍인브로 2022.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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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K 콘텐츠에 시대입니다. 

 

작년 추석 무렵 공개되어 전 세계적으로 돌풍을 일으킨 K드라마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오징어 게임을 비롯해 다양한 한국 드라마들이 전 세계에서 많은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올해만 해도 이상한 변호사 우영호가 7, 8월달을 휩쓸었고, 최신화에서 방영 4주 만에 20%대 시청률을 돌파한 재벌집 막내아들이 또 다른 흥행에 조짐을 보여주고 있죠. 특히 재벌집 막내아들은 한국의 최근 역사를 배경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운 스토리 전개와 배우진들의 탄탄한 연기력을 바탕으로 해외에서도 많은 인기를 얻고 있죠. 그렇기에 이번 재벌집 막내아들의 인기는 한국 드라마의 세계적인 인기에 저변을 한 단계 더 넓혀 나갔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또한 소설 원작인 재벌집 막내아들이 웹툰으로 또 드라마로 재탄생하여 성공을 이어나가면서 한국의 다양한 문화가 서로서로 영향 끼치는 모습까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되고 있죠. 한편  한국 드라마 외에도 영화, 음식, 케이팝 등 다양한 분야의 한국 콘텐츠들의 힘이 갈수록 맹위를 떨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요. 이에 따라 미국의 CNN, 뉴욕타임즈, 영국 가디언,  파이낸셜 타임스 등 다양한 외신들이 한국 문화의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며 많은 보도를 쏟아내고 있죠. 실제로 영국의 가디언은 모든 것은 K(코리아)로 통한다며 전 세계가 한국과 사랑에 빠졌다고 보도할 정도입니다.

 

최근 프랑스의 일간지 르몽드의 자매지인 국제전문 월간 시사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한류 쿨코리아와 소프트파워의 예술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Dec. 2022)하며 한류의 역사와 동시에 어떻게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가 전 세계적인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소프트 파워를 가질 수 있게 되었는지 분석했는데요. 해당 기사에서는 한국 드라마, K팝 등이 다른 나라의 것들과 어떤 차별성을 가졌는지 어떤 역량을 가졌는지를 역사와 함께 자세히 분석했는데요. 해외 기사치고는 상당히 디테일한 부분이 많아서 해당 기사를 요약하였습니다. 

 

한국의 기술주도 대중문화는 1990년대부터 큰 수입원이 되었고 작은 나라를 새롭게 브랜드화 한 세계적인 현상으로 바뀌었습니다. 한류 런던 빅토리아의 앨버트 박물관의 한류 전시회는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리고 다음에 무엇이 올지를 탐구하는 첫 번째 주요 전시회입니다. 핼러윈의 안타까운 사건이 일어난 한국의 한 지역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다른 어떤 사건보다 크게 다가갔습니다. 전 세계 사람들은 한 번도 방문해본 적이 없지만이 동네에 좁은 골목과 동네 술집들의 모습에 익숙했는데 식당을 여는 부적응집단에 관한 스토리를 담고 있는 이태원 클라스는 2020년 케이블tv 드라마가 전 세계적인 넷플릭스 히트작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한국 드라마에 성공은 한류라고 알려진 한국의 대중문화의 국제적인 인기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케이스였습니다. 한류라는 용어는 2000년대 중국에서 남성 밴드 HOT가 베이징 콘서트에 1만 2천여 명의 팬들을 끌어들였을 때 생겨났습니다. 한국 드라마와 k-pop에 대한 동아시아의 열풍은 전 대륙에 퍼졌고, 2008년에 한국은 문화의 순수출국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보이밴드인 BTS는 한국 경제에서 46억 5천만 달러의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멤버들은 UN의 친선대사 역할을 맡고 있기까지 합니다. 심지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 6월 백악관에서 혐오 사건에 대해 맞서기 위해 BTS와 함께 손가락 하트 제스처를 취하면서 사진을 찍기도 했습니다. 한류의 힘은 대중문화상품의 수익성 있는 수출 그리고 다가오는 관광객 수입의 연쇄적인 증가를 넘어서 패셔니스타들 사이의 한국의 국민의상 한복과 미식가들 사이의 김치 그리고 한국어 학습까지 전반적으로 한국 문화의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작년에 26개의 한국어 단어들이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추가되기까지 했죠. 한국은 이제 소프트파워 지수 측정국가들의 문화적 매력에서 11위에 올라 있습니다. 소프트 파워는 근육질 이웃을 가진 작지만 재능있는 국가들이 그들의 무게 이상으로 펀치를 날릴 수 있게 합니다. 또는 1990년에 이 용어를 만든 하버드 교수 조지프 나이가 쓴 것처럼 "유혹은 항상 강요보다 더 효과적이다"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한류는 서양 특히 미국의 문화적 우월성에 도전할뿐만 아니라 올해 이태원 클라스의 일본 리메이크 사례처럼 한국의 전 침략자가 멋진 한국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이름을 바꾸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줍니다. 케이팝은 세계적인 팬덤을 얻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기 위해 소셜미디어 플랫폼을 활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문화를 세상에 가져오면 경제적인 부가 올 것이다라는 말을 sm엔터테인먼트의 수장 이수만이 하기도 했죠. 그렇다면이 소프트 파워는 어떻게 얻어졌을까요? 한류의 현상을 설명하고 분석하는 첫 번째 전시회인 런던 빅토리아의 앨버트 박물관에 한류 전시회는 서울의 화려하고 부유한 남부지역에 합류하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을 풍자하는 케이팝 비디오인 강남스타일을 보여주는 스크린의 벽과 함께 시작됩니다. 쾌활한 비트, 말 타는듯한 동작, 불손한 유머를 담고 있는이 전염성 있는 패러디는 유튜브 조회수 10억을 기록한 최초의 뮤직비디오였습니다. 싸이의 파스텔 핑크 슈트에서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최초의 한국 영화이자 오스카 작품상까지 거머쥔 봉준호의 기생충 세트에 이르기까지 이 열광적인 전시회는 한국 드라마와 영화 케이팝 음악 그리고 한국 패션과 뷰티의 이정표를 보여줍니다. 어쨌든 이 전시회에 가장 중요한 점은 역사적 맥락을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한류를 형성한 문화적 혼성에는 경쟁적 영향권이 기여했습니다. 일본은 근대성을 가져오는 척하면서 미국 음악과 영화를 금지했고 한국어도 금지했죠. 반면 1945년 이후 한국은 1990년대 후반까지 일본문화 수입을 금지했고 미국 대중문화가 지배적으로 부상했습니다. 그러나 이 문화의 문은 1961년에서 87년까지 한국 역사의 암흑기 동안 닫혀버렸습니다. 수출주도에 한강의 기적으로 인한 수십 년간 급속한 산업화와 경제성장은 문화보호주의와 검열을 동반했습니다. 긴 머리와 미니스커트는 1971년에 금지되었고 예술적 자유는 억압되었죠. 이후 민주주의가 찾아오고 1990년대 말 일본문화 수입품의 범람과 함께 헐리우드 수입에 대한 규제가 풀리면서 이러한 문화들에 대한 반감은 깊은 친밀함을 배제하지는 않았지만, 한국의 문화적 부상의 한 요인이 되었을 수 있습니다. 힙합, r&b, 레게의 문이 열린 1990년대 초 한국어로 랩을 하며 케이팝 닦는데 일조한 서태지와 아이들과 같은 사례들을 보면 알 수 있죠. "한류는 정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유기적으로 흘렀다" 나는이 말을 2010년대에 당시 한국 문화관계자에게 들었습니다. 그러나 30년 만에 처음으로 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섰을 때 김영삼 정부는 1994년 스티븐 스필버그의 쥬라기 공원에서 얻은 흥행 수입이 150만 대를 판매한 현대자동차의 수익을 초과하는 것에 주목했습니다.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가 경제를 황폐화시키자 김대중 대통령은 할리우드 영화와 영국의 뮤지컬의 수익에 주목하고 전자제품과 자동차에서 대중문화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기업과 개인 그리고 정부가 합심한 노력이 영화적 르네상스를 이끌었습니다. 실제로 1999년에 한국 영화 쉬리의 전국적인 흥행 수입은 타이타닉을 능가했습니다. 어쨌든 한국 정부의 가장 큰 기원은 신기술을 수용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국은 13세기에 금속활자를 발명했고, 수백 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혁신적입니다. 비디오 아트의 아버지인 백남준은 1960년대와 70년대 가전제품의 대량생산에 대응하여 TV 화면이 깜빡이는 미라지 스테이지를 1986년에 구상했습니다. 산업화가 더디게 진행되면서 일본과 관련된 문제가 발생했다고 확신한 정부들은 정보통신 기술을 빠르게 채택하여이 국가를 세계에서 가장 디지털의 정통한 사회 중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대부분의 가정은 2010년대까지 광대역 통신에 접속할 수 있게 되었죠. 구텐베르크 성경이 나오기 수십 년 전인 1377년에 최초로 인쇄되었다고 알려진 책들 중 하나는 삼성의 첫 번째 휴대전화부터 mp3 플레이어, 터치스크린 전화에 이르기까지 그 맥락을 같이 합니다. 기술력은 문화 수출의 경쟁력을 부여했습니다. 만화가 할리우드 슈퍼히어로들을 부채질했듯이 한국의 웹툰은 이태원 클라스를 포함해서 성공적인 한국 드라마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한편 케이팝은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 플랫폼을 이용하여 세계적인 팬덤을 얻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조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문화를 세계에 가져온다면 경제적인 부가 뒤따를 것이다." 이 문장은 문화적 지배에 따른 부와 제국건설에 서구 역사를 뒤집는 것을 의미하죠. 아마추어 자막 제작자들이 영화 수출에 도움을 주었듯이 케이팝 팬들은 아이돌에 대한 입소문을 퍼트리면서 그들이 세계로 퍼져나가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프로슈머와 프로듀서 모두가 디지털 콘텐츠를 생성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피오나 배는 그녀의 책 메이크 브레이크 리믹스 K-스타일의 부상에서 복제가 아닌 반항정신으로 가득 찬 케이스타일이 한국적인 스타일과 함께 다양한 영향력을 혼합하여 새로운 진정성을 갖게 한다고 말합니다. 한국의 문화적 정체성이 희석되기는 커녕 케이팝 아이돌들이 주로 한국어로 노래하고, 패션 디자이너들이 한복을 재창조하는 등 전통에 대한 더 큰 용이성을 시사하죠. 라몬 파체코 파르도가 그의 책 새우에서 고래로 잊혀진 전쟁에서 k팝으로에서 결론 지었듯이 한류는 한국인들의 자유주의적 가치와 자신의 뿌리에 대한 자부심 모두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에서는 한국문화의 다양성 때문에 한국의 모든 생산물을 하나로 묶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2017년 한국 정부가 한류의 글로벌 팬클럽 회원수를 2020년 목표를 뛰어넘어 1억 명으로 늘리겠다는 계획을 발표 당시 코로나 상황을 고려하면 살짝 오싹해집니다. 다행히도 한국 문화는 이미 온라인에서 혁신적이게 번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코로나의 영향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코로나 이후 사회가 보여준 모습은 접촉에 대한 열망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화적 물결이 어떻게 지속될 수 있는지뿐만 아니라 다음에 어디로 향할 수 있는지 냉정하게 지켜보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다. 

Image ⓒ Le Monde diplomatiq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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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ud Korea ch., 14 Dec.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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