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우리와 교류했던 나라에선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고 기록했을까? 과거 한반도와 꾸준히 교류해왔던 중국의 역사책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들여다봤습니다.
중국은 과거부터 자신들의 민족을 중심으로 세계질서를 구성하며 주변 이민족을 '오랑캐'라고 부르며 멸시했습니다. 그들은 동서남북 위치에 따라 주변 민족을 서융, 남만, 북적, 동이로 분류했는데, 특이하게도 동이에 대해서는 높은 평가를 내렸습니다. 동이에게서 자신들과 유사한 농경문화를 발견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이는데 그러면서도 동이를 우리의 조상인 '예맥계'와 말갈과 여진족에 조상 격인 '숙신계'로 나눠 예맥계는 선진적으로 숙신계는 낙후하고 불결하며 이웃나라를 상습적으로 약탈하는 야만인으로 묘사했습니다.
진수의 삼국지나 후한서, 양서, 위서 등에는 고구려의 위치나 건국설화를 소개하며 그와 함께 고구려 사람들의 특징에 대해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공통적으로 나오는 이야기는 '흥'의 민족답게 고구려 사람들이 노래와 춤을 좋아했다는 이야기인데요 밤마다 남녀가 귀천의 구분 없이 떼 지어 모여 노래를 부르며 유희를 즐겼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결혼하지 않은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경우가 많았는데, 고구려의 습속이 음란하다고 기록했습니다. 이와 함께 아무나 지아비로 삼는다는 기록과 남녀가 사랑하면 바로 결혼시킨다는 기록도 있는데, 고구려는 다른 지역에 비해 연애결혼이 자유로웠던 것으로 보입니다. 후한 이후 완전히 유교국가로 탈바꿈한 중국에서는 이러한 풍습이 낯설고 신기했던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외의 기록으로는 '걷는 속도가 마치 뛰는 것처럼 빨랐다.', '깨끗한 것을 좋아하며 술을 잘 빚었다.', '쪼그리고 앉는 것을 좋아한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고구려가 한나라로부터 시작해 후한, 조위 등 중국의 여러 나라와 마찰을 빚었기 때문인지 국가 자체에 대해서는 다소 부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는데요, 고구려 사람은 성질이 흉악하고 급하며 노략질하기를 좋아해 옥저와 동예를 복속시켰다고 되어 있습니다. 반면 중국과 직접적인 마찰이 없던 부여에 대해선 '체격이 크고 성질은 굳세고 용감하며, 근엄, 후덕 해 다른 나라를 쳐들어가거나 노력질 하지 않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편 이 부여에 대해선 한 가지 특이한
문화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나라의 재앙이 오거나 흉년이 들면 왕을 쫓아내거나 죽이는 문화인데요. 나라의 재앙이 오는 것은 왕이 정치를 못해서라는 발상은 중국에도 있었지만 부여처럼 죽이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부여 사람들이 흰색을 좋아해 흰 옷을 잘 입는다는 기록도 있는데 괜히 '백의 민족'이라고 불린 게 아닌 것인지 이후 신라 고려에도 흰 옷을 좋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이것은 조선 그리고 해방 후까지 이어집니다.
7세기 중반 신라는 위기의 직면했습니다. 백제의 40년에 걸친 파상공세와 영양왕 즉위 이후 강화된 고구려의 공세, 여기에 일본과의 관계도 좋지 않았고 바다엔 왜구 있었으니 사방팔방에 적 밖에 없었죠. 결국 신라는 고립을 탈피하고자 당나라와 외교관계를 강화하고자 하는데요. 643년 신라는 당나라의 사신을 파견해 구원병을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당나라에서 돌아온 답변은 신라를 무시하는 답변이었습니다. 당태종은 현실적인 이유를 들며 거절하더니 신라의 왕이 여자라서 주변국이 만만하게 보는 것이다라고. 신라의 왕이 여자인 것을 비웃었습니다. 사실 당태종의 인성과는 별개로 당나라의 입장에서 신라의 왕이 여왕인 것은 정말 생소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중국의 황제는 고대부터 일부 다처제에다 황제의 서자에게도 순위가 밀릴지언정 제위 계승권을 인정했기 때문에 계승권자가 모자랄 이유가 없었습니다. 당나라 사람에게 있어 성골 남성이 없으니 성골 여성이 왕이 된다는 것은 정말 이해하지 못할 상황이었겠죠. 하지만 이렇게 신라와 여왕을 비웃던 당 나라는 당태종이 죽고 41년 후 당태종의 첩이자 당 고종의 황후 그러니까 며느리이기도 한 측천무후에게 나라를 통째로 빼앗깁니다. 690년 측천무후는 당나라의 국호를 주나라로 바꾸고 중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여성 황제가 됩니다. 12세기 초 당시 외교적으로 고립된 송나라는 이를 탈피하기 위해 1123년 고려의 대규모 사신단을 파견했습니다. 사신단의 일원이던 서긍은 고려에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이것이 바로 '고려도경'입니다. 현대 한국인이 중국인보다 청결에 민감하다고 여겨지는 것처럼 12세기에도 고려인들은 중국인보다 청결의 민감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려도경에는 고려인들은 매일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목욕을 한 뒤 외출하며 하루에 두 차례 정도 목욕한다고 되어 있고 흐르는 시냇물에 모여서 남녀 구별 없이 모두 옷을 벗고 목욕을 하는데 그걸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고려 사람들은 옛날부터 그러던데 지금도 그런다라며 과거 고구려인이 깨끗한 것을 좋아했다는 사실과 이어서 봤습니다. 서긍은 고려의 식문화에서도 차이를 느꼈는데 고려도경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려는 불교를 좋아하고 살생을 경계해 왕과 재상이 아니면 고기를 잘 먹지 않는다. 사신이 올 때면 가축을 잡아 대접하긴 하는데 도축할 때는 가축의 손발을 묶어 불속에 던져 잡고 만약 다시 살아나면 몽둥이로 쳐서 잡는다. 이처럼 도축 기술이 서툴러 국으로 끓이거나 구워도 냄새가 심하다. 중국인들은 육식을 매우 좋아했기 때문에 이렇게 고기를 잘 먹지 않는다는 것과 제대로 도축을 하지도 못한다는 것을 신기하게 여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재밌는건 비슷한 케이스가 18세기 조선과 일본 사이에도 있었다는 것인데요. 일본에 통신사로 파견된 원중거는 자신이 쓴 '화국지'에서 일본인은 육식을 싫어하고 도축기술이 엉망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서긍의 고려도경은 전반적으로 고려와 우호 관계를 맺기 위해 왔기 때문인지 고려의 우호적인 기록을 꽤 남겼습니다. 거란이나 서한은 정해진 땅도 없고 집도 없이 떠돌아다니며 관청도 없는 야만인이지만, 고려는 그렇지 않다거나 오랑캐는 머리나 옷 관리가 엉망이고 온몸에 문신을 새겼는데 고려는 안 그렇다고 했죠. 물론 평가 기준은 철저하게 송나라의 기준이었습니다. 고려가 야만인이 아닌 이유도 중국의 풍습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와중에 고려가 자국의 고유한 문화나 풍속을 갖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결국 문명화가 되긴 했어도 근본은 오랑캐라며 비하했습니다. 종합하자면 중국 입장에선 우리가 그냥 봐줄 만한 오랑캐였다는 것이겠네요.
조선과 명나라는 14세기 후반 잠시 마찰이 있던 경우를 제외하면 약 20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밀접하면서도 지속적인 교류를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우호적인 분위기에도 임진왜란이 터지자 명나라가 생각하고 있던 조선에 대한 이미지는 한순간에 박살이 나 버립니다. 당시 명나라는 조선에 대해 고려를 계승한 국가로 근원을 따지면 고구려의 후손으로 생각했습니다. 당연히 고구려라면 그 강대했던 수나라의 100만 대군을 물리치고 당나라에게도 패배를 안겨줬던 억세고 강한 국가였고 바로 앞의 고려라면 전성기를 누리던 요나라와 세 차례 맞붙어 승리했으니, 조선 역시 강력한 국가라고 생각했죠. 이것은 명나라가 세워졌을 당시 그 많은 군대를 갖고도 이성계의 조선을 견제했던 이유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그랬기에 임진왜란 초기 조선의 연전연패를 믿을 수 없었고, 명나라 일각에선 전쟁은 핑계고 조선이 일본과 연합해 명을 치려는 것이 아니냐라는 음모론까지 돌았습니다. 어쨌든 조선을 돕기로 한 명나라는 전쟁을 겪으면서 조선을 지적했는데 그들은 조선이 스스로 강해지지 않으면 문제 해결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강대하던 고구려의 후손은 어쩌다가 저리 나약 해졌는가에 대한 분석을 시작했는데요. 1593년 6월 선조를 만난 병부원외랑 유황상은 조선은 고구려 때부터 강국이었는데 조선에 들어와 백성들이 농사와 공부에만 몰두하다가 이지경에 왔다고 분석했고, '만력삼대정고'의 저자 모서징은 고구려가 수당을 물리칠 정도의 강력한 적수였는데 이후 그 계승자들이 중국의 풍습에 빠져 나약하게 되었다라고 했으며, 같은 시기 명나라의 관리 십향고는 수당시절의 고구려는 중국 동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였는데, 조선에 들어와 명의 문풍과 가르침에 젖어들며 나약해졌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전반적으로 그 강하던 고구려의 후예가 나약해진 이유가 글공부에 몰두해서라고 했는데 그러면서도 중국의 풍습과 문화, 학문을 받아들여서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다만 이러한 분석은 일종의 '투정'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1596년 12월 일본이 조선을 재침하자 조선은 다시금 명나라에 지원군을 요청했는데 유동순무어사 이화룡은 매번 전쟁이 날 때마다 우리가 도와줄 수는 없지 않냐 고구려 시절 강성함을 스스로 되찾아봐라라고 말하며 알아서 좀 해결하라는 식으로 투덜됐습니다. 이후 명나라는 임진왜란에서 많은 국력을 소모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들의 문화가 스스로를 나약하게 만들었기 때문인지 만주족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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퍄퍄킴 역사 ch., 22 Oct.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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